대학생 10명중 7명은 '예비캥거루'
캥거루족은 게으름의 문제 아니다...사회구조적 딜레마 반영한 것
방예원, 정유정 기자
3/15/2025 8:59:12 PM 등록 | 수정 3/15/2025 9:01:16 PM
기획
사회

"제가 저기 나오는 연예인들보다 더 심한 캥거루족인 것 같아서 이 프로그램은 부모님이랑 같이 보기는 힘들 것 같아요.”
최근 MBC every1에서 정규 편성되어 방영을 앞둔 예능 프로그램 ‘다 컸는데 안나가요’에 대한 대학생 서모씨의 반응이다. 이 프로그램은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스타들의 일상을 통해 공감을 자아내는 일상 관찰 예능”이다.
시청자 반응은 프로그램의 취지와 사뭇 다르다. 프로그램이 공개된 후 “청년들 몰아붙이기 쩌는 이 사회답다”, “나도 나가고 싶은데 내 집이 없는데 어떡하냐” 등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공감을 일으키기보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님으로부터 아직 독립하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심리적 압박이 된다는 반응이다.
◆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미취업 20대 캥거루족 분포
‘캥거루족’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가 될 만큼 한국 사회에서 익숙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캥거루족’은 넓게는 성인이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자녀를 지칭한다. 좁게는 만 25세를 기준으로 학교를 졸업한 이후 취업 여부와 무관하게 부모에게 의존해 사는 세대를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한국에서는 특히 20대, 미취업 청년 캥거루족 분포가 높다.
한국진로창업경영학회가 9월 발간한 ‘미취업 청년 캥거루족의 부모 경제적 의존 유형화 및 결정요인’ 논문에 따르면 “국내 캥거루족은 30대보다 20대 중후반까지 부모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월등히 높고, 미취업 청년의 비율이 2012년(47.4%)에서 2020년(66.0%)까지 급속하게 증가(18.6%p)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대학 시절부터 스스로 캥거루족이 되기로 결심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삶을 선택한 20대 초중반을 ‘예비 캥거루족’이라 지칭한다. 이들은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시도하기보다는 부모의 지원을 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연세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20대 최모씨는 “부모님께 지원받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다”며 “어쩔 수 없이 캥거루족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부모의 지원을 받는 걸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 예비 캥거루족, 졸업 후에도 캥거루족으로 남는다
예비 캥거루족의 증가는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캥거루족으로 남을 가능성을 키운다.
취재팀은 지난 2주간 연세대학교 재학생 87명을 대상으로 생활비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총 응답자 중 87.5%가 현재 부모나 가족의 지원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중 71.4%는 졸업 후에도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했다. (▲조사 대상: 연세대학교 재학생, ▲조사 규모: 87명, ▲조사 방법: 온라인 설문조사 플랫폼 활용 ▲조사 기간: 2024년 12월 02일(월)~14일(금))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주연 교수는 “예비 캥거루족의 의존이 단순한 경제적 도움에 그치지 않고 독립을 미루는 습관으로 굳어진다”고 지적했다. 부모가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한 것이 대학생들의 자립 의지를 약화시켜 장기적으로 자녀의 독립을 늦춘다는 것이다.
◆ 대학생들의 경제적 의존, 높은 주거비와 취업난이 원인
대학생들이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캥거루족이 되기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높은 주거비 때문’이라는 답이 가장 많았다. ‘취업이 어렵다’와 ‘생활비가 부담된다’는 점이 그 뒤를 이었다.
연세대학교 재학생 20대 최모씨는 “학업으로 인해 한정된 시간에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대학생이 월세와 생활비를 모두 버는 것은 요즘 물가로는 불가능하다”며 “대학생때부터 이른 독립을 하고 싶어도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말했다.
◆ 저출산 시대의 부모-자녀 관계, 친밀감에서 의존으로
경제적 의존은 단순히 물질적 도움을 받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박 교수는 "한국 가족의 자녀중심적 특성이 이러한 의존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며 “부모는 자녀의 성공을 위해 재정적·정서적으로 아낌없이 지원하며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고 설명했다.
20대 대학생 자녀를 부양하는 강모씨는 "아직 취업 전이라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은 당연하다"며 "자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진로를 정할 때까지는 기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배경에는 저출산 현상도 자리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00년 1.48명에서 2023년 0.72명으로 급감했다.
박 교수는 “자녀가 줄어든 만큼 부모는 한 명 혹은 두 명의 자녀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친구 같은 부모가 이상적인 부모상으로 여겨지며 성인이 된 자녀에게도 이러한 친밀감이 지속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부모-자녀간의 친밀감이 의존적 관계로 변질되면서 독립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 청년 독립, 비난보다 거시적인 해결책이 우선
최근 방영된 예능 ‘다 컸는데 안나가요’는 캥거루족 문제를 가볍게 풀어보려 했지만 청년 세대에 대한 편견을 더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학생 서모씨는 “프로그램이 캥거루족 자녀를 게으르고 무책임한 존재로 그려낸다”며 “우리가 처한 경제적 현실이나 사회적 배경을 간과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왜 독립하지 못하느냐?’가 아니라, ‘청년들이 독립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질문을 바꿀 때다.
박 교수는 "청년들이 부모와 물리적으로 떨어져도 자신만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청년 주거 안정화 정책을 확대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년들의 일자리를 확보하려는 정부와 기업의 거시적인 노력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디어 역시 청년 세대의 문제를 비난하는 데 그치지 말고 문제 해결을 위한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캥거루족은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딜레마의 반영이기 때문이다.